사라지는 페이지에 대하여
Inkling은 제품이라기보다 하나의 질문입니다. AI와의 대화가 기록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다르게 말하게 될까요?
가설
대화형 AI의 기본값은 축적입니다. 모든 대화가 남고, 검색되고, 다음 대화의 재료가 됩니다. 그 축적이 유용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유일한 형태일 이유도 없습니다.
Inkling은 반대쪽을 세워봅니다. 여기 적힌 것은 저장되지 않고, 화면에서도 곧 옅어집니다. 남는 것은 기록이 아니라 말해봤다는 경험입니다.
검증하려는 가설은 하나입니다. 사라진다는 보장이 자기 개방(self-disclosure)의 문턱을 낮춘다는 것.
왜 손으로 쓰나
타이핑은 균질합니다. 어떤 문장을 쓰든 키를 누르는 힘과 속도는 대체로 같습니다. 손글씨는 그렇지 않습니다. 망설임은 획의 떨림으로, 감정은 필압과 크기로 종이에 남습니다.
두 입력 방식을 토글로 나란히 둔 것은 편의 때문이 아닙니다. 같은 말을 손으로 쓸 때와 두드릴 때 무엇이 달라지는지, 그 자체를 관찰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왜 느리게 나타나나
이 페이지의 답장은 즉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손이 움직이는 속도로만 쓰입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로딩이 아니라 인터페이스의 일부입니다.
Hallnäs와 Redström이 말한 slow technology는 효율을 목표로 하지 않는 기술을 제안합니다. 성찰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기능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답장이 다 쓰이기까지의 몇 초 동안, 당신은 방금 자신이 쓴 문장을 다시 읽게 됩니다.
종이는 한 번에 한 사람의 것입니다. 건넨 글이 완전히 스며든 뒤에야 답장이 시작되고, 답장이 다 사라진 뒤에야 종이가 당신에게 돌아옵니다. 둘이 한 장을 나눠 쓰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건너뛰기' 버튼은 없습니다. 대신 접근성을 위한 우회로는 모두 열어두었습니다.
리들
답하는 쪽은 리들이라고 부릅니다. 리들은 조언하지 않습니다. 판단하지 않고, 해결하려 들지 않고, 요청받기 전에는 제안하지 않습니다. 대개 당신이 쓴 말 중 한 조각을 그대로 옮겨 적고, 많아야 하나의 질문을 남깁니다.
그럼에도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기를 바랐습니다. 종이와 잉크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감각을 가끔 드러내되, 신비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절제했습니다.
손으로 쓰는 존재는 길게 쓰지 못합니다. 답장이 길어야 세 문장인 것은 비용 절감이 아니라 설정에서 따라 나온 제약입니다.
가끔은 쓰는 대신 그립니다. 비, 새싹, 매듭, 모래시계 같은 예순 가지 중 하나를, 밑줄과 동그라미를 그리는 그 손으로. 문장이 더 나쁘게 말할 자리에서만이고, 그린 것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아주 가끔은 그림 하나가 답장 전부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남고, 무엇이 남지 않나
이 서버에 저장되는 것은 없습니다. 데이터베이스가 없고, 대화 내용은 로그에도 남지 않습니다. 오류를 기록할 때도 내용이 아니라 오류의 종류만 남깁니다.
답장을 만들기 위해 대화는 OpenAI API로 전송되며, 저장하지 않도록(`store: false`) 요청합니다. 다만 OpenAI가 남용 감지를 위해 입출력을 최대 30일 보관할 수 있고, 조직에 Zero Data Retention이 설정된 경우에는 보관하지 않습니다.
대화 맥락은 브라우저 탭의 메모리에만 있습니다. 새로고침하거나 탭을 닫으면 그대로 사라지고, 복구 방법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브라우저에 저장되는 것은 테마·언어·입력 방식·소멸 속도 같은 설정뿐입니다.
사라지는 인터페이스의 책임
사라지는 텍스트는 접근성 위험입니다. 읽는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화면을 다시 볼 여유가 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전체 내용은 시각적 소멸과 무관하게 스크린리더용 영역에 그대로 남습니다. 동작 줄이기 설정을 켜면 필기 애니메이션은 생략됩니다. 종이 아무 곳이나 누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추고, 원하면 소멸을 아예 끌 수도 있습니다.
탭이 가려져 있는 동안, 그리고 당신이 무언가 쓰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돌아왔을 때 백지를 마주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아닌 것
Inkling은 의료·상담 서비스가 아니며, 진단이나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하루를 되짚어보는 인터랙션 프로브에 가깝습니다.
지금 많이 힘들다면 혼자 견디지 않아도 됩니다. 자살예방상담전화 109, 정신건강위기상담전화 1577-0199는 24시간 연결됩니다. 응급 상황에서는 119로 연락해주세요.
참고
- Hallnäs, L. & Redström, J. (2001). Slow Technology — Designing for Reflection.
- Dunne, A. & Raby, F. (2013). Speculative Everything.
- Pennebaker, J. W. & Beall, S. K. (1986). Confronting a traumatic event: toward an understanding of inhibition and disease.
- Odom, W. et al. (2014). Designing for Slowness, Anticipation and Re-visitation.